‘남극의 눈물’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남극도 울고 나도 울었다.

 

남극 황제펭귄의 번식 과정을 보고 '개고생이란 이런 것이구나'를 느꼈다. 

 

황제펭귄은 남극 한겨울에 알을 낳는 유일한 동물이다.

 

그때 천적들이 추위를 피해 남극을 떠나기 때문이다.

 

근데 알고 보니 동료 펭귄 놈들이 죄다 천적이다.

 

남의 알을 뺐는 것도 모자라 새끼도 납치해 간다.

 

사는 게 참 하드코어다.

 

 

 

암컷이 알을 낳으면 수컷이 2개월 간 알을 품는다.

 

그런데 알을 품는 자세가 거의 고문이다.

 

발등 위에 알을 올리고 아랫뱃살로 덮어서 알을 감싼다.

 

알이 빠져나갈까봐 물 먹을 때 빼고 거의 움직이지 못한다.

 

알이 영하 50도 추위에 20초만 노출되어도 얼어버리기 때문이다.

 

수컷은 알을 품는 4개월 동안 몸무게가 절반으로 줄어든다.

 

그러는 동안 암컷은 20km를 걸어서 해안가로 간다.

 

먹이를 구하기 위해 수심 500미터까지 잠수한다.

 

몸속에 저장한 음식물을 토해서 알에서 깨어난 새끼에게 먹인다.

 

내가 황제펭귄으로 태어났다면 하느님의 자식이 되거나 속세를 떠난 스님 펭귄이 됐지 싶다.

 

 

 

진짜 놀라운 장면은 황제펭귄이 자식을 다 키우고 나서 보인 행동이다.

 

생후 6개월이면 새끼 펭귄은 솜털이 빠지면서 어엿한 성체의 모습을 갖춘다.

 

그러면 부모 펭귄은 새끼를 두고 영영 떠나버린다.

 

죽을 고생하면서 새끼를 키웠지만 미련 따위 없다.

 

새끼도 부모에게 울며 불며 매달리지 않는다.

 

묵묵히 제 살길을 찾아간다.

 

이렇게 자식은 부모로부터 완전히 독립한 개체로 살아간다.

 

그것이 자연의 기본 룰이다.

 

 

 

인간은 부모로부터 독립하는 시기가 다른 동물보다 늦다.

 

우선 생물학적 이유가 있다.

 

'고등 사회동물'일수록 양육기간이 길다고 한다.

 

망아지는 태어나자 마자 걷기 시작하고 만 3살이면 번식이 가능하다.

 

인간은 생후 1년 후에나 걷고 신체가 성숙하기까지 15년이 걸린다.

 

교육과 놀이를 통해 사회적 능력을 습득하기까지 오랜 보살핌이 필요하다. 

 

 

 

특이하게 인간은 신체가 성숙해도 바로 독립하지 않는다.

 

문명이 발전하면서 사회화 과정은 더욱 길고 복잡해졌기 때문이다.

 

내가 7만년 전 구석기 인으로 태어났다면, 돌도끼 다루기, 사냥감 몰아가기, 별자리 보고 지리 파악하기, 등을 배웠을 것이다.

 

그 당시 부족 사회로부터 배우는 지식과 기술은 생존에 관한 문제로 비교적 한정되었다.

 

현대 사회는 훨씬 복잡하기에 살아가는데 필요한 지식의 종류도 다양하고 배우는 기간도 길어졌다.

 

대다수의 현대인이 만 19세까지 교육을 받으며 대개 그때까지 독립은 늦어진다.

 

여기까지는 문화 인류학의 영역이다.

 

 

 

그런데 나의 독립 과정은 생물학과 문화인류학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나는 15세에 신체가 성숙했고, 대학 교육까지 마쳤지만 부모의 둥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독립에는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하나는 '정신적 독립'이고, 다른 하나는 '경제적 독립'이다.

 

 

 

정신적 독립은 사춘기 때  8할 이뤘다고 생각한다.

 

나는 '혼자 차도를 건너지 말라'는 엄마의 말을 초등학교 3학년때까지 따를 정도로 순한 아이였다.

 

하지만 중2병이 창궐하면서 인생의 크고 작은 일을 스스로 결정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 내 모친의 요구사항은 딱 세 가지였다.

 

첫째, 오토바이 타지 말 것.

 

둘째, 담배 피우지 말 것.

 

셋째, 술 마시지 말 것.

 

금기 3종 세트 박살 내기는 중학교 때 시작해서 고등학교 때 완성했다.

 

독립보다는 반항에 가깝긴 해도, 이 것이 '정신적 독립의 상징'이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그 이후부터 인생의 중요한 결정에서 부모의 동의나 허락을 구하진 않았다.

 

 

 

하지만 반쪽짜리 독립이었다.

 

20대 후반까지 경제적으로 자립하지 못했다.

 

20대 나의 직업은 '소비자'였다.

 

생산하지 못하고 소비에 최선을 다했다.

 

필요한 재원은 부모로부터 각출했다.

 

학비, 생활비, 유흥비, 품위 유지비, 해외문화 체험비, 취업 준비 자금, 등 그 종류도 다양했다.

 

부모의 둥지에서 벗어나 스스로 삶을 개척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내가 누리는 삶의 기반이 부모로부터 나오는 한 주체적인 삶이라고 할 수 없다.

 

 

 

스물아홉, 첫 직장을 얻고 독립을 이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때부터 고난의 시작됐다.

 

직장에서는 날것의 문제가 쏟아졌고, 스스로 해결할 힘이 부족했다.

 

현실의 무게에 눌려 무기력한 날이 계속됐다.

 

직장 생활이 힘든 이유가 궁금했고 '늦은 독립'에서 근본 원인을 찾았다.

 

'생존 능력이 부족한 나'를 처음으로 인정했다.

 

나는 안목 있는 소비자였지만, 형편없는 생산자였다.

 

오랜 기간 부모의 울타리 안에서 현실의 어려움을 외면하고 산 대가였다.

 

 

 

독립에는 골든 타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시기를 놓칠수록 회복이 어렵다.

 

나의 독립은 10년이 늦었고 복구에는 최소 20년 이상 걸릴 것을 각오했다.

 

독립을 위한 노력 중 하나가 '빚청산'이다.

 

20대 때 부모에게 지원받은 총액을 계산하여 매달 분할 납부 중이다.

 

주변에서는 부모님 용돈을 주는 나더러 효자라고 한다.

 

물론 빚을 모두 청산하면 입금이 중단될 것을 모르고 하는 말이다.

 

 

 

홀로 남겨진 솜털 뽀송 새끼 펭귄이

 

첫 사냥을 위해 차가운 남극 바다로 뛰어들 때,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첫 사냥에는 아마도 실패할 것이다.

 

운 나쁘면 범고래를 만나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새끼 펭귄은 묵묵히 어려움을 마주하며 살아갈 것이다. 

 

 

 

나는 황제 펭귄처럼 살기로 했다.

 

부모의 품에서 벗어나 홀로 바다에 뛰어드는 용기를 배우고 싶다.

 

먹이를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노력을 본받고 싶다.

 

이것이 나의 독립 선언이며 독립 운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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